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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한다. 나는 미국 편이었다. ‘한겨레신문’을 이끄는 데스크 선배들은 미국 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 나는 ‘선배’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벼운 칼럼이니 그냥 쓰겠다. 요즘은 아이돌도 방송에서 선배라는 단어를 쓴다. 뉴노멀이다. 한 아이돌 멤버는 방송에서 노래 맞히는 게임을 하다 “비발디 선배님!”이라고 외쳐 밈(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됐다. 국적과 시대를 초월하는 선배의 시대다. 세종대왕 선배님이 이 글을 읽으면 무슨 생각을 할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선배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586세대다. 아니다. 더는 586이 아니다. 엑 성공하는1%직장인 스(X)세대인 나도 올해로 쉰이 됐다. 많은 586세대 선배들은 686이 됐다. 386으로 시작해 686이 되고 말았다. 그냥 86세대라고 부르자. 86세대 선배들은 미국을 싫어했다. 정청래 선배는 1989년 주한 미국대사관저를 불태우려다 실패하고 복역하며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1994년 대학에 들어갔다. 행정학과였다. ‘복지부동 한국은행 금리인상 ’하며 한덕수처럼 오래 살아남는 관료를 양성하는 학과라 운동권 선배 활약이 돋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1994년은 운동이 가라앉기 시작하던 해였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니 운동의 단일 목표가 사라졌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다. 고난에도 불구하고 운동권 선배들의 섭외는 계속됐다. 나에게는 오질 않았다. 게스 청바지를 입고 ‘미제 담배 금지’라 연금보험 쓰여 있는 과방에서 ‘말보로’를 피우는 나 같은 놈은 콜라 물이 지나치게 든 열외 인간이었다.
내 세대는 아니라고 변명해도 기본적으로는 몰래 미국 편일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유년기를 보낸 친구들은 미국 문화 세례를 가장 격정적으로 받은 세대다. 미국 대중문화의 본격적인 상업적 전성기가 시작된 시기라 그렇다. 스티븐 스필버그 사단 영화 현대캐피탈대출상담 를 보고 마이클 잭슨 춤을 따라 하던 아이들은 절로 미국화가 된다. 적도 더는 없었다. 1991년 소련도 해체됐다. 학생운동도 하고 미식축구부도 하던 같은 과 친구는 “학생운동 하는 자가 미제 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선배들 명을 받고 운동을 포기했다. 학생운동을 포기했다.
선배들은 엑스세대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요즘 나는 그 시절 선 저축은행금리비교 배들의 마음을 좀 알 것도 같다. 한때 86 선배들에게는 롤 모델이 될 만한 국가가 있었다. 자본주의 첨병인 미국과 균형을 이루던 소련이었다. 그게 사라진 선배들 앞에 미국 물 먹은 애들이 등장했으니 반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내 세대가 미국을 어떤 사상적 아버지의 땅으로 여겼던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좋아한 모든 것은 미국에서 왔다. 서태지도 듀스도 미국 힙합을 모델로 탄생했다. 한국 영화는 미국 영화가 되고 싶어 했다. 1999년 ‘쉬리’를 시작으로 어느 정도 꿈을 이뤘다. 문화는 힘이 세다. 그건 한 세대의 멘탈리티를 정의한다.
미국은 소련처럼 무너질 리도 없었다. 원칙은 있는 국가였다. 공화당이 몇년 해 먹으면 민주당이 해 먹었다. 민주당이 오래 해 먹는 것 같으면 다시 공화당이 해 먹었다. 균형이었다. 문민정부 이후 한국도 그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최근에 그게 착각이라는 걸 크게 깨달았는데, 어쩌겠는가. 그래도 대통령 여럿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미국에서 배워 먹은 민주주의의 실천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미국 말고 따라 할 모델이 별로 없었다. 유럽은 너무 제각각이다. 프랑스는 말만 번드르르하고, 독일은 저지른 일이 있고, 이탈리아는 그냥 한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난달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 오른쪽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행사에 참석한 모습. AP 연합뉴스
망했다. 미국이 롤 모델 포기를 선언했다. 요즘 미국 뉴스는 현실감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이라는 국가를 건설하고 지탱해온 모든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와 싸우고 백악관을 나와 “탄핵!”을 외치는 걸 보며 나는 자지러졌다. 세계 최강 제국을 이끌어가는 남자들이 사춘기 애들처럼 다투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이렇게까지 유치한 시대가 있었던가? 적어도 20세기에는 없었다. 권력은 권위가 있었다. 옳든 그르든 어른의 권위를 지키려 애는 썼다. 블라디미르 푸틴도 유치한 인간이다. 상반신 탈의를 하고 말을 탄 사진을 공개했을 때 그 어린애 같은 행위에 혀를 찼다. 시진핑이 곰돌이 푸 사진을 소셜미디어에서 검열하기 시작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독재자라 그냥 이해할 수 있다. 독재자들은 원래 웃기는 짓을 많이 한다. 트럼프가 독재자인가? 그는 민주주의적으로 뽑힌 리더다. 미국에는 언론과 사법부 등 견제 체계가 존재한다. 독재자라 할 수는 없다. 선출된 권위주의자 정도일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이 글을 쓰며 여전히 미국을 변호하려 애쓰고 있다. 여전히 러시아로부터 소련의 추억을 떠올리며 푸틴 편을 들고야 마는 소수의 86세대 선배들처럼 말이다. 한때 사랑했던 대상을 미워하기란 이렇게 힘이 든다.
소련이 끝났을 때 “역사의 진보는 사회주의로 간다”는 선배들의 믿음은 무너졌다. 선배들은 다들 각자의 모델을 재발견해야만 했다(그러고는 엄청나게 재주 있는 자본주의자가 됐다!). 나 같은 태생적 미국파 자본주의자 엑스세대는 지금이 공황이다. 선배들은 세계화가 악마라고 했으나 우리는 세계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진보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소련 붕괴 이후 세계질서를 설계한 미국이 스스로 질서를 흔들고 있다. 완벽하게 새로운 질서가 시작됐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챗지피티에 “희망이 있냐?” 물었더니 “유연한 전략적 사고가 필수적”이란다. 저도 모르겠으니 알아서들 살아남으라는 소리다.
나도 새로운 롤 모델을 발견해야 할 것 같다. 뭐가 남았을까. 북유럽 사민주의? 요즘 그 동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그 모델도 막을 내리는 중이다. 아니다. 사실 나 따위가 뭐라고 세계사적 대형 고민을 하고 앉았는가. 이 고민은 역사상 가장 이상한 시대를 유연한 전략적 사고로 통과해야 할 이재명 대통령에게 토스하면 될 일이다. 나는 미국 가수 마일리 사이러스의 신곡 ‘엔드 오브 더 월드’(세상의 끝)나 들으면서 이 글을 마칠 생각이다. “세상의 종말이 아닌 척이라도 하자”(Let’s pretend it’s not the end of the world)라는 가사가 아주 내 마음이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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